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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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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
Elton John
2024 BFI 런던 영화제에서 엘튼 존
2024 BFI 런던 영화제에서 엘튼 존
기본 정보
본명엘튼 허큘리스 존
Elton Hercules John
출생1947년 3월 25일(1947-03-25)(79세)
잉글랜드 런던 미들섹스 피너
국적영국
직업음악가
장르팝 록, 글램 록, 소프트 록, 리듬 앤 블루스
활동 시기1962년~
악기보컬, 건반 악기, 기타
학력왕립음악원(RAM) 5년 중퇴
레이블필립스, 콩그레스, DJM, 유니, 파라마운트, MCA, 게펀, 로켓 레코드 컴퍼니, 아일랜드, 유니버설 뮤직 그룹, 머큐리, 아일랜드 데프 잼
소속 그룹블루솔로지(1962~1967)
관련 활동티렉스, 존 레논, 비치 보이스, 닐 세다카, 키키 디, 팀 라이스, 스티비 원더, 디온 워릭, 글래디스 나이트, 퀸, 클리프 리처드, 셰어, 조지 마이클, 건스 앤 로지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리앤 라임스, 리 홀, 시저 시스터스, 레이디 가가, 게리 발로, 폴 아웃 보이 등
서명
웹사이트www.eltonjohn.com

엘튼 허큘리스 존(영어: Elton Hercules John, 1947년 3월 25일~)은 영국의 록 · 팝 가수 겸 작곡가, 사회운동가이다. 영화 · 뮤지컬 음악 작곡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1975년 10월 21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올렸으며,[1][2] 1979년 5월에는 서방국가 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3]과 소련[4][5]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1992년 작사가 버니 토핀과 함께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데 이어[6][7] 1994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단독으로 입성[8] 했으며, 1995년 폴라음악상을 받았다.[9]

1996년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으며,[주 1][10] 1998년에는 음악과 자선활동에의 공헌이 인정되어 2월 24일 서훈식에서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다.[주 2][11][12] 또한 1999년에 그래미 레전드상(Grammy Legend Award)을,[13] 2004년에는 미국 존 F. 케네디 센터 주관 공연예술 평생공로상(Kennedy Center Honors)을 받았다.[14][15]

2002년에는 모교 왕립음악원(RAM)에서 명예 음악박사학위[주 3]를 받았다.[16] 왕립음악원 역사상 명예 박사학위는 이 해 엘튼 존과 지휘자 콜린 데이비스에게 주어진 것이 처음이다. 2006년에는 영화 · 뮤지컬 음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월트 디즈니 컴퍼니로부터 디즈니 레전즈에 선정되기도 했다.[17]

엘튼 존은 그외에 아카데미상 2회(1995, 2020년), 그래미 어워드 5회(1987, 1992, 1995, 1997, 2001년)[13], 골든 글로브상 2회(1995, 2020년), 토니상(2000년), 브릿 어워드 5회(1986, 1991, 1995, 1998, 2013년)[18], 아이버 노벨로 어워드 14회(1974, 1977, 1979, 1986, 1991, 1995, 1998, 2000, 2005, 2007년)[19] 등의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국가별 판매량 인증 합산에 따르면 엘튼 존은 세계적으로 통산 약 1억69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역대 5위), 비공식 기록까지 합산한 추정 판매량은 2억5천만~3억 장에 이른다.

2008년 《빌보드》는 빌보드 핫 100 50주년을 기념하여 50년간 성공적인 차트 기록을 올린 아티스트들의 기록을 분석해 순위를 발표했고, 엘튼 존은 3위에 올랐다.[20]

엘튼 존은 2020년 컴패니언 오브 아너(CH;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서훈자로 지명되었다.[21] 컴패니언 오브 아너는 예술, 과학, 의학, 정부 등 분야에서 긴 시간 지속적으로 주요한 공헌을 한 인물이 대상으로, 영연방 전체에서 65명만이 이 서훈을 받을 수 있다.[22] 대중음악계에서는 베라 린, 폴 매카트니에 이은 세 번째 서훈자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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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과 음악에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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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은 1947년 3월 25일 잉글랜드 런던 근교의 피너(Pinner) 마을에 위치한 외조부모의 집에서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23][24] 1967년 12월부터 '엘튼 존(Elton John)'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4년간 예명으로 사용하다가 1972년 1월 7일에 '엘튼 허큘리스 존(Elton Hercules John)'으로 법적 개명 절차를 마쳤다.[25][26]

엘튼 존은 3살에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으며, 어머니는 그가 에밀 발퇴펠의 〈스케이트 왈츠(Les Patineurs)〉를 외워서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5살 때부터는 정식적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에서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행사에서 제리 리 루이스의 곡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1958년, 엘튼 존은 영국 왕립음악원(RAM) 주니어 코스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고, 입학한 지 4년이 되어 졸업시험만을 앞두었을 때 중퇴했다. 후에 그를 지도했던 한 교사는 헨델 음악의 악보 네 장 분량(Four-page Piece)을 들려주자 그가 즉시 축음기 녹음을 재생하듯이 그대로 따라 연주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아버지 스탠리 드와이트(Stanley Dwight)와 어머니 실라 아일린 해리스(Sheila Eileen Harris)는 둘 모두 음악적인 소양이 있었다. 영국 공군 대대장이던 아버지는 트럼펫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열광적인 음반 수집가였다.[주 4] 그 영향을 받아 엘튼 존은 음악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아버지 스탠리는 아들을 은행원 등 안정적인 직업에 종사하도록 다그쳤다. 아버지 스탠리는 잦은 파견 임무로 집을 비웠고 엘튼 존은 주로 어머니와 외할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그가 15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결국 이혼을 했고, 어머니는 피너의 건축업자이자 도배업자 프레드 페어브라더(Fred Farebrother)와 재혼했다. 엘튼 존은 의붓아버지의 이름 'Fred'의 철자를 거꾸로 바꾸어서 그를 '더프(Derf)'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곧 엘튼 존 가족은 런던 노스우드 힐스 프롬 코트의 8가구 아파트 건물로 이사했다. 후에 아메리칸 탑 40(American Top 40) 차트에 4개 음반을 동시에 올릴 때까지, 엘튼 존은 그곳에서 살았다.[27]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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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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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61년 경, 엘튼 존은 친구들과 함께 '콜벳스(The Corvettes)'를 결성했다. 콜벳스는 피너의 교회나 각종 클럽에서 공연을 열어 주로 로큰롤과 블루스를 연주했지만 몇 차례의 공연을 끝으로 1962년 해산했다.[28] 1962년에는 의붓아버지 더프의 도움으로 노스우드 힐스 선술집의 주말 피아니스트가 되면서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밤에 연주를 했다. 엘튼 존은 짐 리브스의 컨트리 음악 〈He'll Have to Go〉부터 〈When Irish Eyes Are Smiling〉, 〈Roll Out the Barrel〉같은 오래된 선술집 선호곡부터 그 당시 히트곡인 〈King of the Road〉, 그리고 자신이 직접 쓴 곡들까지 다양하게 연주했다.[29]

1962년에는 리듬 앤 블루스 밴드 블루솔로지(Bluesology)를 결성했다. 낮에는 음반사의 잔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런던의 여러 호텔 바에서 독주를 하거나 블루솔로지와 함께 연주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1965년 3월 5일, 피너 카운티 중등학교를 중퇴하기로 결심했다.

1965년 7월 23일, 블루솔로지는 첫 싱글 〈Come Back Baby〉를 발매했으며 1967년까지 2장의 싱글 〈Mr. Frantic〉과 〈Since I Found You Baby〉를 발매했다. 블루솔로지는 아이슬리 브라더스, 메이저 랜스, 도리스 트로이, 패티 라벨, 블루벨르와 같은 미국의 소울, 리듬 앤 블루스 음악가들의 공연 뒷무대에 섰다. 1966년에, 블루솔로지는 당대를 풍미했던 블루스 음악가 롱 존 볼드리(Long John Baldry)를 돕는 보조 밴드 일을 하면서 영국에서 카바레 투어를 시작했다.

엘튼 존은 1967년 6월 17일 리버티 레코드(Liberty Records)의 A&R 매니저 레이 윌리엄스(Ray Williams)가 잡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에 낸 구인 광고에 응했다. 첫 만남에서 윌리엄스는 같은 광고에 응했었던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 쓴 가사를 그에게 주었다. 그는 곧 그 가사로 음악을 만들었고, 버니 토핀에게 그것을 우편으로 부쳤다. 이렇게 '엘튼 존/버니 토핀' 이름의 첫 곡이 되는 〈Scarecrow〉가 작곡되었고, 두 사람의 작사 · 작곡 협업이 시작되었다. 1967년 12월, 엘튼 존은 블루솔로지를 탈퇴하면서 자신의 원래 이름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 보다 발음하기 쉬운 예명을 쓰고자 했고, 블루솔로지의 색소폰 연주자였던 엘튼 딘과 롱 존 볼드리의 이름에서 각각 한 단어씩 따 와서 엘튼 존(Elton John)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29] 이후 이 이름은 1972년에 엘튼 허큘리스 존(Elton Hercules John)으로 개명하며 법적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30]

1967년 11월, 버니 토핀과 함께 딕 제임스 레코드(Dick James Records)에 계약하면서 수많은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31] 계약 초기에는 다른 가수들에게 줄 대중적인 곡들을 작업하라는 회장 딕 제임스의 임무를 수행했다. 1968년 3월 1일에 솔로 데뷔 싱글 〈I've Been Loving You〉, 이어서 1969년 1월 17일에 두 번째 싱글 〈Lady Samantha〉, 1969년 5월 16일에 세 번째 싱글 〈It's Me That You Need〉를 발매했다. 두 번째 솔로 싱글 〈Lady Samantha〉는 상업적으로 실패했으나, 실제 판매에 비해 라디오에서 많이 방영되며 평단으로부터는 호응이 있었다. 〈It's Me That You Need〉는 이후 1971년 5월에 일본에서 발매되어 일본 오리콘 싱글 차트 13위, 오리콘 인터내셔널 차트 2위에 올랐다.

1968년에 엘튼 존이 작사 작곡한 〈I Can't Go on Living Without You〉를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1969에 출품했다. 해당 곡은 룰루가 불렀으며, 영국 예선을 통과한 6곡 중에서 6위를 기록했다. 또한 룰루가 부른 〈Boom-Bang-A-Bang〉이 당시 대회에서 영국 대표로 참가해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32]

1969-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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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 1971년

엘튼 존은 딕 제임스 레코드의 동료들 케일럽 퀘이, 로저 포프 등과 함께 기악 밴드 '브레드 앤 비어 밴드(Bread and Beer Band)'에서 활동했다. 밴드가 녹음한 정규 음반은 1969년 2월에 발매한 싱글 〈The Dick Barton Theme (The Devil's Gallop)〉의 부진한 판매로 인해 음반 판매를 취소했다.[33]

엘튼 존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버니 토핀과 함께 수많은 곡들을 작곡하고 녹음하는 동안에, 각종 음악가의 히트곡들을 커버하거나, 세션 연주자로 참여해 피아노와 백 보컬을 맡으며 활동하기도 했다.[34]

1969년 6월 6일에 첫 정규 음반 《Empty Sky》를 발매했다. 그러나 음반은 상업적으로 실패하였다. 정규 1집은 1975년 1월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매했고 미국 빌보드 200 차트 6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30위에 올랐다.

엘튼 존은 버니 토핀과 같이 부모가 거주하던 런던 노스우드 힐스의 8가구 아파트에 지내면서 수많은 곡들을 만들었다.[주 5] 1969년 11월에는 다음 작품을 작업하기 위해 프로듀서 거스 더전과 현악 편곡자 폴 벅마스터를 섭외했으며, 1970년 1월에 2집 《Elton John》을 작업하여 그해 4월에 발매했다. 네덜란드 음반 차트 2위, 빌보드 200 4위, 영국 음반 차트 5위 등 기록하며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 10월, 〈Your Song〉을 싱글로 발매하여 빌보드 핫 100 8위, 영국 싱글 차트 7위를 기록했다.

2집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음반 부문과 최우수 남성 팝 보컬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리언 러셀, 조지 해리슨 등 유명 음악가들이 엘튼 존에게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엘튼 존을 미국에 진출시키려고 하던 딕 제임스는 18개월 동안 미국에서 엘튼 존에 관심을 가진 레코드 회사를 찾고 있었고, 마침내 유니 레코드와 라이센스 협정을 맺었고, 2집으로 미국에서 음반 계약을 얻었다. 그렇게 미국 진출을 앞두고 있던 엘튼 존은 같은 해 3월에 결성한 백 밴드 "엘튼 존 밴드"의 1기 멤버 나이절 올슨, 디 머리를 포함한 각종 동료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고 1970년 8월 25일부터 8월 30일까지 캘리포니아주 웨스트할리우드에 위치한 트루버도어(Troubadour) 클럽에서 첫 미국 공연을 진행했다. 이 공연들로 뜨거운 반응을 얻는 데 성공했다.[35]

1970년 10월 발매한 《Tumbleweed Connection》은 영국 음반 차트 2위, 빌보드 200 5위 등을 기록했고, 엘튼 존은 이 해 3월부터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순회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17일 뉴욕의 A&R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공연이 1971년 4월에 라이브 앨범 《17-11-70》으로 발매되었고, 빌보드 200 11위, 영국 20위, 캐나다 10위 등 기록했다. 1971년 11월 발매한 4집 《Madman Across the Water》는 빌보드 200 8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9위, 영국 음반 차트에선 41위 등 기록했고, 싱글 〈Levon〉, 〈Tiny Dancer〉를 발매했다.

《Madman Across the Water》에 참여한 기타리스트 데이비 존스톤이 1972년부터 순회공연에 참여해 백 밴드의 정식 멤버가 되었으며, 1972년 5월 발매한 5집 《Honky Château》는 빌보드 200 1위, 영국 음반 차트 2위 등 기록했다. 미국에서 1위를 기록한 첫 번째 음반이 되었으며, 5주간 1위를 기록했다. 싱글 〈Rocket Man〉, 〈Honky Cat〉이 싱글 차트 10위 진입에 성공했고, 〈Rocket Man〉은 영국에서 2위를 기록했다.

1973년 1월 발매한 6집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는 빌보드 200 1위, 영국 음반 차트 1위, 캐나다 음반 차트 1위 등 기록했다. 영국에서 1위를 기록한 첫 번째 음반이 되었으며, 1973년 영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를 거둔 음반이 되었다. 싱글 〈Crocodile Rock〉, 〈Daniel〉은 싱글 차트 10위 진입에 성공했고, 〈Crocodile Rock〉은 미국에서 1위를 기록한 첫 싱글이 되었다. 6집부터 한동안 MCA 레코드를 통해 음반을 발매했다.

1973년 10월 발매한 7집 《Goodbye Yellow Brick Road》는 빌보드 200 1위, 영국 음반 차트 1위 등을 기록했고, 전 세계적으로 3천만 장 이상의 판매를 거두었다. 싱글 〈Saturday Night's Alright for Fighting〉, 〈Goodbye Yellow Brick Road〉, 〈Candle in the Wind〉, 〈Bennie and the Jets〉는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Bennie and the Jets〉는 미국에서 1위를 기록한 두 번째 싱글이 되었다. 7집은 롤링 스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 목록 9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73년 11월, 〈Step Into Christmas〉를 싱글로 발매하여 영국 싱글 차트 24위, 빌보드 크리스마스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 곡은 1974년 8집 《Caribou》의 1995년 리마스터반에서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었고, 2009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크리스마스 팝송 리스트에서 9위를 기록한 바 있다.[36] 《Madman Across the Water》부터 참여한 타악기 연주자 레이 쿠퍼는 1973년 12월부터 순회공연에서 참여하여 백 밴드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1973년, 엘튼 존은 버니 토핀, 거스 더전, 전직 매니저 존 리드 등과 함께 〈Rocket Man〉의 이름을 따와 로켓 레코드 컴퍼니를 설립했다. 이 레이블을 통해 닐 세다카가 재기작들을 발표했으며, 키키 디를 포함한 다양한 가수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74년 6월 발매한 8집 《Caribou》는 미국 빌보드 200 1위, 영국 음반 차트 1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1위 등 기록했다. 싱글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The Bitch is Back〉은 싱글 차트 10위권 진입했으며,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는 빌보드 핫 100에서 2위를 기록, 1975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레코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1974년 11월 발매한 컴필레이션 음반 《Greatest Hits》는 빌보드 200 1위, 영국 음반 차트 1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1위 등 기록했다. 미국에선 11주 동안 1위를 기록했고, 전 세계적으로 2천 4백만 장 이상의 판매를 거두어 가장 많이 팔린 엘튼 존의 음반이 되었다.

엘튼 존은 미국의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에게 바치는 노래 〈Philadelphia Freedom〉을 1975년 2월 싱글로 발매했고, 빌보드 핫 100 1위, 캐나다 RPM 차트 1위 등 기록했다. 이 곡은 빌보드 R&B 차트에서 32위를 기록했고, 엘튼 존은 1975년 5월 17일 흑인음악 전문 프로그램 《Soul Train》에 출연하여 이 곡과 1974년 빌보드 R&B 차트 15위에 오른 〈Bennie and the Jets〉를 불렀다.

1975년 5월 발매한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는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무명 시절을 다룬 자전적 음반이다. 빌보드 200 1위, 영국 음반 차트 2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2위 등 기록했으며, 빌보드 200에서 역사상 최초로 데뷔 1위에 오른 음반이 되며 도합 7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 1976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음반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싱글은 〈Someone Saved My Life Tonight〉 한 곡만 발매되어 빌보드 핫 100 4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2위 등 기록했다. 1975년 10월 발매한 10집 《Rock of the Westies》는 빌보드 200 1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1위, 영국 음반 차트 5위 등을 기록했으며, 빌보드 200에서 데뷔 1위에 오른 두 번째 음반이 되었다. 싱글 〈Island Girl〉은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기록했고, 1976년 1월에 발매한 〈Grow Some Funk of Your Own〉과 〈I Feel Like a Bullet (In the Gun of Robert Ford)〉는 더블 싱글로 발매하여 빌보드 핫 100 14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8위 등 기록했다.

엘튼 존은 1975년 10월 25일과 26일에 다저 스타디움에서 2회 공연했다. 모든 공연에서는 100,000명 이상의 관중이 참석했으며, 공연 당시의 배경과 실황을 담은 방송이 방영되었다.[37]

1976년 4월에는 1974년 5월 18일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 공연과 1974년 11월 28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음반 《Here and There》를 발매했고, 빌보드 200 4위, 영국 음반 차트 6위 등 기록했다. 같은 해 6월에 키키 디와 듀엣으로 부른 〈Don't Go Breaking My Heart〉를 싱글로 발매하여 빌보드 핫 100 1위, 영국 싱글 차트 1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위 등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 싱글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첫 엘튼 존의 노래가 되었고, 37년이 지난 2013년 6월에는 영국에서 백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38]

1976년 10월 발매한 11집 《Blue Moves》는 미국 빌보드 음반 차트 3위, 영국 음반 차트 3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4위 등 기록했다. 싱글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는 빌보드 핫 100 6위, 영국 싱글 차트 11위 등을 기록했고, 1977년 1~2월에 발매한 후속 싱글 〈Bite Your Lip (Get Up and Dance!)〉와 〈Crazy Water〉는 싱글 차트 10위권 진입에 실패했다.

1977-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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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서 별을 받는 엘튼 존

1972년부터 1975년까지 3년간 발매한 6장의 정규 음반들과 1장의 컴필레이션 음반은 모두 미국에서 연속 1위 기록을 세웠으며, 솔로 데뷔 6년 만에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하는 등 막힘 없이 이어지던 성공으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왕성한 활동으로 인한 번아웃 증후군을 앓았다. 엘튼 존은 1976년 10월 7일, 《롤링 스톤》 인터뷰에서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다.[39] 이후 1992년 같은 잡지 인터뷰에서 동성애자로 재차 커밍아웃했다.[40]

1977년 11월 3일, 웸블리 아레나에서 불우 아동을 위한 축구 시설 건립에 힘쓰는 자선단체 클럽을 위한 자선 공연을 열었다. 키키 디와 듀엣으로 〈Don't Go Breaking My Heart〉를 불렀고, 스티비 원더가 공연의 마지막 노래 〈Bite Your Lip (Get Up and Dance!)〉에 참여해 피아노, 탬버린을 연주하면서 노래도 불렀다. 엘튼 존은 이 날 공연에서 공연 활동을 중단하겠다며 은퇴 선언을 했으며, 이 공연을 끝으로 몇 개월 동안 휴식을 취했다.

1978년 3월 21일에 컴백 싱글 〈Ego〉를 발매했지만 빌보드 핫 100 34위, 영국 싱글 차트 34위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Ego〉가 발매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다시 정규 음반을 작업했으며, 오랜 협업으로 지친 탓에 서로에게 쉴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잠시 갈라선 버니 토핀 대신 영국의 작사가 게리 오스번(Gary Osborne)과 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작업한 12집 《A Single Man》은 10월에 발매했고, 미국 빌보드 200 15위, 영국 음반 차트 7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12위, 프랑스 SNEP 음반 차트 2위 등 기록했다. 싱글 〈Part-Time Love〉는 빌보드 핫 100 22위, 영국 싱글 차트 15위 등 기록했고, 6분여의 연주곡 〈Song For Guy〉는 영국 싱글 차트 4위 등 기록했다.

1979년부터 다시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레이 쿠퍼와 함께 진행하는 2인조 구성으로 선보였으며, 1979년 2월 스웨덴부터 1979년 12월 호주까지 10개월 동안 진행했다. 5월에는 서방국가 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소련 시절 러시아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41]

1979년 1월, 엘튼 존은 음향 기술자 클라이브 프랭크스(Clive Franks)와 함께 1977년 10월 녹음하고 2년간 보류하고 있던 음반 《The Thom Bell Sessions》를 리믹스했고, 그해 6월에 〈Mama Can't Buy You Love〉, 〈Are You Ready for Love〉, 〈Three Way Love Affair〉까지 총 3곡으로 수록한 12인치 EP 음반으로 발매했다. 〈Are You Ready for Love〉와 〈Mama Can't Buy You Love〉를 싱글로 발매했고, 〈Are You Ready for Love〉는 영국 싱글 차트 44위를 기록, 〈Mama Can't Buy You Love〉빌보드 핫 100 9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0위 등 기록했다. 1977년 10월에 《The Thom Bell Sessions》를 작업하면서 총 6곡을 녹음했는데, 여기서 3곡을 1979년 발매했고, 나머지 3곡 〈Nice and Slow〉, 〈Country Love Song〉, 〈Shine on Through〉는 1989년 2월에 22집 《The Complete Thom Bell Sessions》로 발매하기 전까진 12년간 공개하지 않았다.

1979년 10월 발매한 13집 《Victim of Love》는 엘튼 존이 작곡과 건반 연주에 참여하지 않고, 보컬만 맡았으며, 수록곡은 독일의 디스코 프로듀서 피트 벨로트와 실베스터 르베이 등의 전문 작곡가들이 작사 작곡을 맡았다. 그러나 음반은 빌보드 200 35위, 영국 음반 차트 41위 등 기록하며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척 베리의 곡을 디스코로 편곡한 〈Johnny B. Goode〉를 싱글로 발매했지만 차트 진입에 실패했고, 타이틀 트랙 〈Victim of Love〉는 미국 빌보드 핫 100 31위 등 기록했다.

1980년 5월 발매한 14집 《21 at 33》는 버니 토핀이 다시 엘튼 존과 협업한 첫 앨범이 되었으며, 게리 오스번을 포함해 영국의 가수 톰 로빈슨(Tom Robinson)과 주디 추크(Judie Tzuke)도 작사에 참여했다. 미국 빌보드 200 13위, 영국 음반 차트 12위, 프랑스 SNEP 음반 차트 3위, 뉴질랜드 음반 차트 3위 등 기록했다. 게리 오스번 작사의 〈Little Jeannie〉는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위, 빌보드 핫 100 3위를 기록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 순회공연부터 디 머리와 나이절 올슨이 1975년 이후로 재합류했으며, 9월 13일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진행된 공연에선 4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참석했다.[42] 1978년 이후 밴드를 탈퇴한 데이비 존스턴은 1982년 재합류했다.

《21 at 33》부터 7장의 정규 음반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