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K의 삶과 시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6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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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 번씩 그럴 때가 있죠. 내가 인생 설계를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때 말이에요. 대개 일이 계속 잘 안 풀린다 싶을 때에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아마도 빠르면 사춘기일 것이고, 늦어도 취업 준비를 할 때쯤에는 크고 작은 좌절과 후회를 만나리라 싶은데요. 사실 그걸 알아차렸을 때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늦어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들 하죠. 차마 변화할 용기가 없는 우리들은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길을 찾아낼 뿐입니다.


하지만 그저 그런 자신의 방식대로 계속 살아가다 보면,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삶의 가치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삶을 앞서나가는 선두 주자가 아니었기에 항상 몇 걸음 뒤에서 삶의 무대를 지켜보았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것이, 의외로 사람들은 물질만능주의의 신봉자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각자 추구하는 관심사가 전부 다르고, 그 욕구가 얼마큼 충족되면 ‘그럭저럭‘ 지낼만한 삶으로 변모한다고나 할까요? 하여 겉 보기엔 그리 볼품없는 인생일지라도 그 자신은 제법 떳떳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었죠.


문학은 곧 영웅 서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웅 중에는 성공한 영웅도 있지만 실패한 영웅, 즉 안티 히어로도 존재해요. 1등만 기억하는 이 세상은 성공 못하면 실패라는 결론이 지배적입니다만 문학 세계에서는 얘기가 다릅니다. 실패자들도 제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에 저항하는 반反 영웅이기 때문에요. 따라서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모델과 일치하지 않을수록 일종의 독립투사라고 봐도 되겠네요. 그와 같은 시선으로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쿳시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인데 영 글맛은 없더군요. 개인적으로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인상이었습니다.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서사와 건조한 문체의 조합이었죠.


이번 주인공은 입술이 달팽이처럼 말려 올라간 구순열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자들이 다 그렇듯 K의 삶 또한 녹록지 않았죠. 훗날 정원사가 되었지만 전쟁의 여파로 해고되고 살 곳을 잃어 연로한 모친과 함께 떠나기로 합니다. 허나 모친은 사망하고 홀로 남겨진 K는 곧 자연인으로 살아가는데요, 세상은 결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어요. 경찰들에게 발각되어 수용소에 갇히고, 탈출했지만 후에 또다시 붙잡힙니다. 분명 그는 자유로웠지만 자유 신분까지는 아니었던 거죠. 강제로 끌려온 그는 수용소 내의 규범을 강요받으며 최하급 신분으로 강등됩니다. 아니, 잘난 구석이 하나 없다지만 그래도 멀쩡히 살아가던 개인이 한순간에 짐승 취급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K는 그저 자기 삶을 살아가려 했을 뿐인데, 세상은 그것조차 눈엣가시였던지 자꾸만 그의 삶에 개입했습니다. 이렇듯 살려고 아무리 손발짓을 해도 고통의 궤도를 벗어날 수 없는 게 바로 우리네 삶이 아닐까 합니다.


수용소를 탈출하고 은거 중이던 그는 또다시 연행되지만 아사하기 직전의 영양실조 상태라서 병실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를 맡게 된 담당 군의관은 이 사회성 없고 소통불가한 환자에게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되고요. 무엇보다 K는 수용소의 음식을 절대 거부했어요. K의 그같은 고집은 침묵 시위나 묵언 수행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자신과 맞지 않는 음식물일 뿐이었어요. 그처럼 원치 않는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자신을 실험용 쥐처럼 대하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K에게서 양가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왜 저렇게 자신의 도덕과 신념과 원칙을 고수하지 못했을까. 무력하단 이유로 온갖 병폐들을 묵인해왔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다소 한심하고 자기주장 한 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 친구에게 많은 공감이 갔습니다. 저 역시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별문제 일으키지 않고 잘만 지내는 타입이거든요? 하지만 세상은 어떻게든 저 같은 사람도 문제 삼고 헐뜯고 싶어 한다는 걸 날마다 실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세상에게 퍽 복종하지 않으려는, 세상과 짝하지 않으려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눈밖에 나는 겁니다. 뭣도 아닌 것들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니는 게 아니꼬워 보일 테죠. 잘난 사람을 시기하는 것도 모자라 못난 사람한테도 시기하다니, 정말 촌스럽지 않나요?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는 게 세상의 이치라면,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정답이지 싶네요.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산다는 건 안정성과 정체성을 맞바꾸는 일입니다. 반대로 남들과 다른 길을 가겠다면 고생한 만큼의 확신을 얻을 테고요.


​요즘 인기 절정인 <오디세이> 영화의 주인공은 전통적인 영웅이죠. 하지만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영웅 서사를 각자의 삶으로 들여올 수가 없습니다. 영웅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마이클 K처럼 안티 히어로가 되는 게 나아요. 이 말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되시나요? 글쎄요. 세상에게 열심히 아부하고 굽신거려봤자 세상은 절대 우리 편이 아닙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던 말도 이제는 너무 낡아버렸죠.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게 아닌, 사회가 조종하는 꼭두각시로 살고 있음에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다수가 옳다고 하는 것들이 각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아닌지도 의심해 봐야 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좁은 문 너머에 있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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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 출간 50주년 기념 개정판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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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젊어서는 새로움을 쫓다가 나이 들어서는 익숙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그것이 나 자신과 꼭 가깝지만은 않거든요. 또 다른 익숙함을 발견하면 지금껏 동고동락했던 것들도 자연스레 뒷전이 되고 말아요. 사람이 ‘자아‘라는 복잡한 문제에 발을 담그게 되면 자신이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는 무의식적인 습관이 만들어집니다. 수차례의 반복을 통해 제법 스스로를 파악했을 무렵부터 삶은 단순하게 흘러간 듯해요. 저의 경우는 그랬습니다. 그런데요, 자아성찰을 밥 먹듯이 했던 제 자신의 정의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간다는 점을 종종 느끼고 있어요. 예를 들어 저는 인간관계에 대한 긴긴 연구 끝에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라고 매듭지은 사람이에요. 헌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이 틀렸다라기보다도 사람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존재라고 보고 있죠. 이것은 저만의 오래된 익숙함이자 확고부동한 정의였지만 특별한 계기도 없이 그렇게 바뀌었어요. 이래서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들 했던가 봅니다.


어른들의 환상동화라 불리는 <모모>를 이제서야 읽었어요. 재미도 있고 메시지도 좋았지만 갈수록 전개가 SF 장르로 바뀌는 게 제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SF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탓이기도 하고요.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버려진 원형극장에서 홀로 살아가는 모모가 등장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꼬마 소녀에게 속마음을 다 털어놓거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어 가는 등 다양한 활력과 위로를 받곤 했어요. 그러다가 이 마을에 회색 신사들이 나타나서 모두의 평화를 앗아갑니다. 그들은 시간저축은행의 영업사원들로, 낭비되는 시간들을 아껴야 한다며 모두를 설득했고, 그 말에 넘어간 사람들은 이내 여유를 잃고 매우 바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후로 모모를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이 사태를 바로잡고자 하는 모모의 모험이 시작된다는 내용인데요. 다 읽고 보니 사태 해결이나 결말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인들의 바쁜 삶에 대한 풍자였으니까요.


인류는 최초의 농업 문화를 시작으로 해서 지금의 4차 산업혁명까지 많은 발전을 해왔습니다. 기술의 진보 덕분에 지금 우리는 너무도 편리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더 여유로움을 가져다주었느냐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죠. 진보 사회에서 절대 만족이란 건 없으므로 현대인들은 이 편한 세상에서도 쉼을 얻지 못할 운명이라죠. AI 산업 쪽 분들에게 듣자 하니, AI가 일거리를 줄여준 게 아니라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줘서 총체적으로 업무량이 대폭 늘어났다네요. 이렇듯 기술발전의 현대사회는, 회색 신사들에게 시간을 빼앗겨 여유와 행복을 잃어버린 모모의 마을 분위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작중에서 회색 신사들은 개개인에게 당신이 허비한 시간들을 합치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며, 아주 그럴듯한 계산법과 말들로서 우리가 그동안 헛살았다는 듯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들어보면 그게 꼭 틀린 말도 아니에요. 내가 시간을 좀 더 아껴 쓰고 잘 활용했더라면 원하는 학교나 직장과 스펙을 얻었을 수도 있을 텐데, 하는 후회를 누구나 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내온 시간들과 자신의 행복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리죠. 그래서 지금 큰 불만 없이 살아가는 이들도, 내 삶의 방식들이 어딘가 잘못됐다는 착각과 번민에 빠져버린다는 게 문제입니다. 요즘은 SNS가 그런 문제의 원인이 되겠죠. 다들 부자에다 맨날 놀고먹는 모습들뿐인데 그렇지 못한 나는 지금 잘못 살고 있다는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 따라서 우리는 시간 낭비보다도 회색 신사들을 상대하지 않는 일에 더 주의를 기울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살면서 총 세 번의 백수 생활을 겪었는데요, 바쁘게만 살다가 여유가 생겨나니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서 참 좋았거든요. 직장인일 때에는 아침햇살도 달갑지 않고, 커피 맛을 음미할 새도 없고, 시원한 매미 울음소리도 그저 소음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백수가 되고 보니 한순간에 아름다워지지 뭐예요. 그래서 든 생각은요, 현대사회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내 스스로 여유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거였어요. 요즘 저는 독서를 줄이고 운동을 해서 근육량을 늘리고 일찍 취침하는 패턴으로 바꾸었습니다. 건강에 신경 쓴 만큼 확실히 여유도 생겨났어요. 근무시간에 졸리지도 않고, 체력이 늘어나니 집중력도 높아지고, 직원들한테 화도 잘 안 나요. 이런 과정 속에서 제가 줄곧 정의해왔던 익숙함 들은 점점 낯선 것들이 돼가더군요. 여러모로 나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모모>에서는 시간을 도둑맞은 일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비교하는 삶에 대한 문제처럼 느껴졌어요. 유행의 민족인 한국은 남들이 하는 만큼 나도 하지 않으면 도태된 삶이라는 인식이 널리 깔려있는데요, 남들이 갓생을 산다 해서 나까지 그래야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보여지는 삶‘에 충실할수록 여유와 행복은 창문 열고 밖으로 새나갈 겁니다. 이것은 남들을 의식하지 말고 온전히 나에게만 시간을 쏟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아무튼 진짜 유용한 시간들은 나뿐만 아니라 서로에게도 유용하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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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선인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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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대 초였을 때만 해도 세계 인구가 한 60억 명 정도였습니다. 2026년인 지금은 약 82억 명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보면 인구수가 말도 못 하게 늘어났다고 볼 수 있죠. 그럼에도 오늘날 전 세계는 바닥치는 출산율과 취업률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약 20억 명이나 증가한 데다 경쟁자 수가 적을수록 취업에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인구 감소를 걱정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구수가 크게 증가할 때마다 심화된 폭력성으로 자연과 문화들은 줄줄이 파괴되었다고 하네요. 아무튼 가방끈 짧은 제 생각에는 지금보다 더 인구가 줄어들어도 될 듯하거든요. 유독 인구 밀도가 높은 수도권의 출근길을 보노라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짜 숨이 턱턱 막히죠.


좁은 공간에서 지내는 동물들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는데 사람이라고 뭐 다를까요? 현대인들이 극도로 예민해진 데에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지켜지지 않은 탓도 있다고 봅니다. 물리적, 심리적인 것들을 다 포함해서 말이에요. 자, 그러다 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이 사회 구조에 대해 불만인 자들이 온갖 방식으로 질서를 깨려고 할 겁니다. 거기에는 신분에 따른 사회계층에 대한 경멸도 들어있을 테고요. 가면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 가운데서 멀쩡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는 범죄자가 아님에도 스스로를 선하다거나 건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워요. 자아가 생겨났을 때부터 세계 멸망을 꿈꿔왔기 때문이죠. 아무튼 인구 밀도로 인해 도드라지는 사회 문제들을 볼 때마다 역시 한번은 리셋이 필요하다는 강한 확신이 듭니다.


반가운 김호연 작가님의 신간을 읽었네요. <서울의 선인>은 구약 성경 속의 한 장면을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창세기 18-19장을 보시면, 죄악 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는 신 앞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간청합니다. 그 패역한 땅에서 열 명의 의인이라도 있다면 심판을 거두어 달라고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그의 가족 외에는 전부 멸망했다는 내용인데요, 김호연 작가님은 이 ‘예정된 심판‘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작중 배경이 서울이라는 말에, 멸망당해도 싸다는 생각부터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요. 제가 선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철물점 주인인 김재근 씨는 어느 재미교포 손님에게 묘한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자기는 신의 명을 받들어 타락한 도시인 서울을 멸하러 온 천사로써, 의인 하나라도 발견한다면 심판을 보류한다는 뭐 그런 얘기였어요. 믿을만한 이유는 요만큼도 없었지만 어느덧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천사 손님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합니다. 천사가 그를 지목한 것은 주인공이 서울 의인상 1회 수상자였기 때문인데요. 수상자들 중에서 여전히 의인 다운 자가 있다면 심판을 멈출 테니, 1회 수상자가 직접 찾아봐달라는 청탁을 받게 된 겁니다. 보수까지 넉넉히 받은 김재근 씨는 이내 씁쓸한 과거가 떠오릅니다. 검은 돈을 챙긴 혐의로 불명예 퇴직을 했던 경찰이라는 사실을요. 의인상이라는 타이틀에 먹칠한 김재근 씨는 왜 천사에게 선택받았을까요? 천사들이 그의 사정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이제라도 회개할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을까요? 수만 가지 의문점을 뒤로한 채 주인공은 의인상 수상자들을 만나러 갑니다.


듣자 하니 수상자들은 모임을 몇 번 가졌던가 봅니다. 아무튼 반신반의하며 만나본 동료들은 더 이상 의인이라고 할 수 없는 몰골이었습니다. 개중에는 완전히 잘못 봤다 싶은 사람도 있었고요. 김재근 씨는 타락한 옛 동료들을 거울삼아 자신의 추악함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사람도 나이 먹으면 흔들리기 마련인데요, 하물며 인생의 오점을 남긴 사람은 두고두고 후회되지 않을까요? 이제 결과야 어찌 되든 김재근 씨는 지난날들을 사죄하고픈 심정이었습니다. 그 바램과 달리 의인은 없었고, 자칭 천사는 열흘 뒤에 서울이 무너질 테니 멀리 떠나라고만 하네요. 고작 수상자 몇 명만으로 서울 전체가 타락했다고 보는 건 너무 억지스럽지만, 범죄자에다 도망자였던 주인공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김재근 씨의 순탄했던 인생이 전락하게 된 배경에는 제3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조폭들에게 쫓기던 한 여성을 구하여 의인상을 받고 특채 경찰이 되었던 주인공은, 자기가 평생의 목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거죠. 싸움에서 패배하여 무리를 떠난 짐승은 얼마 못가 죽어버리고 맙니다. 대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밑바닥을 찍은 사람의 회생 또한 기대하기 어렵거든요. 그저 남은 생애 동안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하면서 절망과 한탄으로 지낼 뿐입니다. 이처럼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여 숨만 붙어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뭐라 할 수도 없습니다. 순간의 실수나 방심으로 나 또한 패잔병이 될 테니까요. 아니, 어쩌면 나와 당신은 이미 패잔병인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는 걸 수도 있겠죠. 그런 현대인들에게 김호연 작가는, 지난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할 마음이 있는지 떠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제 그만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자는 숨은 뜻이 아니었나 합니다.


현대 사회는 몇 번의 좌절만으로도 나를 완전히 녹다운시키고, 어떨 때는 완전히 나락 가게 만들어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게 합니다. 그런 피해자들 중 하나인 김재근 씨는 딱히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독자들과 같이 아주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어요. 그럼에도 천사는 일개 시민에게 세상을 구원할 사명과 역할을 주었단 말이죠? 저는 이 점이 아주 의미심장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요. 모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는 전제하에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꿀만한 힘을 가졌다고 볼 수 있어요.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처럼 얼마든지 각성하여 이전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 같은 성장을 기대하려면 누구보다도 내가 나 자신을 믿어주어야만 하겠고요. 아무튼 적다 보니 리뷰가 옆길로 샜는데 뒤 내용은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었어요. 첫 단추를 잘못 꿰었으면 언발란스 룩으로 살면 된다고요. 이 얼마나 훌륭한 사고방식입니까. 부디 남은 생은 힙하게들 살아봅시다. 두둥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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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거명령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7 미치 랩 시리즈 6
빈스 플린 지음, 이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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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무더운 여름에는 공포영화를 보고 스릴러소설을 읽어주는 것이 국룰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 같은 여름만의 문화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합니다. 언젠가부터 영화사는 더 이상 공포영화를 만들지 않고, 출판사는 외국의 액션·스릴러 소설을 들여오지 않습니다. 돈이 안되니까 그런 거겠죠. 한때 장르물에 열광했던 저조차 거의 등한시하는 걸 보면 말 다 했네요. 아무튼 날씨와 업무의 여파로 인한 독서 슬럼프를, 묵혀두었던 빈스 플린의 책으로 이겨냈습니다. 여하간 미치 랩 시리즈는 언제 봐도 명불허전입니다.


시리즈의 주인공 미치 랩은 CIA에서 근무하는 대테러 요원입니다. 하지만 정식 직원이 아닌 용병이라 할 수 있는데요, 시리즈 초창기에 테러로부터 백악관을 지키고 대통령의 목숨을 구한 공로로 지금까지 프리랜서처럼 활동할 수 있게 됐다죠. CIA의 일이란 게 매우 극비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언젠가 미치 랩의 대활약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타국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져버렸습니다. 적들에게도 그의 신상이 널리 알려져, 예전과 같은 첩보 활동이 힘들어졌죠. 허나 테러리스트를 처단하는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미치 랩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사명을 다할 따름입니다. 이를 보며 누군가는 뛰어난 직업정신이라 할 테지만 사실 그는 옛 애인을 죽인 테러범들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에요.


인물 소개는 이 정도로 해두고, 이야기는 사우디 왕궁의 한 인물이 랩에게 포상금을 걸고 암살 계획을 시도합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랩에게 복수하겠다는 건데요, 랩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아무튼 한 중개인이 거금을 받고서 고용한 암살자가 랩의 집으로 향합니다. 랩과 아내가 집으로 들어갔을 때 설치해뒀던 폭탄을 터뜨려버리죠. 이로써 랩의 아내는 사망하고, 랩도 수백 미터 날아갔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정신이 든 랩은 임신 중이던 아내가 죽은 것과, 이게 다 나 때문이라는 자책감과,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과, CIA 안전가옥에 감금된 상황 등 여러 가지로 절망과 한탄에 빠집니다. 아내를 잃은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는 CIA와 상부기관에서 그를 가둬둔 거죠. 솔직히 랩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아내를 잃을 거라는 상상조차 못했거든요. 그래서인지 너무 막장 전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랩의 직업상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을 누구나 예상했을 거예요. 제가 그런 위험 직군이라면 가족을 만들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예.


위 사건이 나오기까지 진도도 느리고 이렇다 할 액션씬도 없고 해서 꽤나 지루했습니다. 초반부에 CIA를 관리할 국가정보원 신임 국장이 등장하는데요,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이 야망가는 CIA를 자신의 권력을 돋보이게 할 수단으로 써먹고자 했죠. 하지만 무소속 광전사인 주인공은, 저 분탕치는 미꾸라지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캐릭터가 아녔죠. 신임 국장에게 제대로 공포심을 심어주었으나 정신 못 차린 국장은 끝까지 빌런 짓을 한다는 뭐 그런 내용입니다. 아셔야 할 게, 액션물이 다량 첨가되어 있지만 사실 요 시리즈는 정치 스릴러인데요. 그래서 국가를 위협하는 테러집단과 더불어 내부에 숨어있는 적들과도 늘 싸워야만 합니다. 그런 이유로 매번 부패한 정치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가님의 깡다구가 언제 봐도 예술입죠. 그치만 이번 편은 확실히 지루했어요. 차후 스토리의 방향을 잡기 위한 징검다리 편이었다곤 해도 말이에요.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절반쯤 넘기면 랩이 복수전에 나섭니다. 랩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암살을 계획한 사우디 일행은 갱단을 고용하여 랩이 묵고 있는 CIA의 안전가옥을 기습공격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랩은 노련하게 적들을 제거해나가죠. 그리고 자신의 골드멤버들과 함께 적들을 역추적하여 묵사발 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다렸던 주인공의 통쾌한 액션을 볼 수 있어 좋았지만, 어째 너무 일방적으로 혼쭐내는 것 같아서 아쉽긴 하네요. 아무튼 미치 랩의 무너진 멘탈을 다음 편에서 어떻게 회복할지가 관건이겠어요.


이런 장르소설들은 굳이 주제나 메시지를 찾을 필요가 없어서 좋죠. 그냥 스토리만 따라가도 재미있으니까요. 하지만 머리 좋은 작가들은 꼭 인물의 고뇌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못다 한 말을 전하거든요. 이번 작품에서도 그래요. 미치 랩은 아내를 죽인 암살자를 끝내 살려둡니다. 왜 그런지는 직접 읽어보시고요, 이번 일이 무데뽀에다 다소 감정적으로 행동하던 주인공의 성질을 죽이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와 전혀 맞지 않는, 매번 부딪히고 대립하는, 심지어 폭력을 휘두를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만납니다. 경우에 따른 처세법들이 있을 텐데 그중에 제일은 이해와 포용으로 대상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는 그 점을 제대로 시사했죠. 서로 다른 민족, 사상, 성별, 언어, 이념, 문화, 관습을 가진 사람끼리 만나면 불편한 게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매번 감정을 앞세워서 해결할 것도 아니고, 반대로 회피하기만 해서 좋아질 일도 아니니까요. 하여간 이런 장르에서조차 어른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저도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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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9
앙드레 지드 지음, 오현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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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았던 일들도 시간이 흐르고 보니 점점 무뎌지고 그럭저럭 살만해졌거든요. 그 같은 일들을 몇 번 반복 경험해서 그런지, 언젠가부터는 힘든 상황이 닥쳐도 나중 되면 괜찮아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꼭 문제를 해결해서 좋아지는 것만은 아니에요. 인간은 도무지 손쓸 방법이 없어 질질 끌고만 있는 상황 중에도 곧잘 적응하기 때문이에요. 해결도 않고 딱히 덮어둔 것도 아닌 고민거리들은 어느새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지만 아주 한 번씩 따끔거릴 때가 있을 뿐이죠. 잊고 살다가도 꼭 한 번씩 나를 찌르는 그 가시의 이름은 ‘미련‘이 아닐까 합니다. 미련은 ‘끝났음을 인정하지 못해 과거에 머무는 마음’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 말처럼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은 우리를 과거 어느 시점에 묶어놓고 거기까지가 자신의 한계라 믿게 만들죠.


앙드레 지드가 쓴 <좁은 문>은 금지된 사랑이라는 해결 불가한 문제를 징하게도 길게 끌고 가는 작품입니다. 사촌지간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데, 왜인지 알리사가 제롬을 자꾸 거부해요. 딱히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두루뭉술하게 만 둘러대면서 거절합니다. 최대한 보지 말자면서 그놈의 편지는 맨날 쓰는 거 있죠? 솔직히 이 정도면 정신병이라도 해도 할 말이 없어요. 사정이 있건 없건 말을 안 해주니깐요. 아무튼 제롬은 완강한 태도의 그녀가 요구하는 거리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밀어냈으면 포기할 법도 하건만 사랑에 빠진 남자의 순애보란 그리 말처럼 간단한 것도 아니걸랑요. 그래서 두 사람은 요즘 표현으로 ‘랜선 연애‘만 하는 사이가 돼버렸습니다.


그녀의 사정은 대강 이렇습니다. 교회에서 ‘좁은 문‘에 관한 설교를 듣고,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 어떤 걸림돌도 있어선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은 제롬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그를 향하는 마음이 행여 구원의 길을 막는 꼴이 될까 봐, 둘이서는 그 좁다란 길을 지나가지 못할까 봐 끝까지 혼자이기를 선택한 거죠. 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매우 깊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의 해석과 판단이 왜 정답이라고 밀어붙였는지가 참 의문입니다. 목사님한테 가서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혹시 왜곡되게 해석한 건 아닌지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싶더군요. 허나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았던 것은, 바람 나서 떠나버린 모친에 대한 상처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사랑의 종말을 목도한 그녀의 입장에서 깊은 사랑의 발전이 겁나기도 했을 겁니다. 다만 그러한 속내를 제롬에게는 말해줬어야죠. 그게 어려우면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내던가요. 말이 금지된 사랑이었지 내가 갖긴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정말 이기적인 태도였습니다. 마치 결혼을 계속 미루면서 결혼 적령기인 여자의 시간을 잡아먹는 못된 남자들의 얘기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제 사랑을 굽힐 맘이 없는 제롬이 그닥 멋져 보이진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사랑에 도전하고 작게나마 희망을 걸었다지만 사실 그도 알고는 있었을 거예요. 자신이 꿈꾸고 바라던 그림은 끝내 만들어지지 않을 거라고요. 저라면 크게 싸웠을 거예요. 나를 그렇게까지 밀어내면서 희망고문은 왜 하느냐고 말이죠. 그 역시 혼자서 답을 찾느라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을 겁니다. 알리사가 그랬듯이 제롬 또한 자신의 판단에 왜곡이 생기게 되었죠. 어쨌거나 제롬은 그녀의 원인 모를 입장을 지지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삶의 전부가 그녀를 위한, 그녀에 대한, 그녀로 인한 이유들로 움직여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뭘 어쩌지도 못했으니까요. 세월이 훌쩍 지나서도 여전한 그의 미련들은, 어쩌면 그를 살아가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도 붙들고 있다는 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서일 거예요. 나를 좀먹기까지 하는 그 아픈 기억들은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놀라운 변화를 불러올 겁니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아주 흉한 몰골로 지낼 수도 있겠습니다만, 각자의 ‘좁은 문‘을 통과한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래요, 어쩌면 나와 당신의 ‘좁은 문‘은 누군가에게 물어서 확답 받을 수 있는 게 아닐 테죠. 결국은 자신이 그 의미를 파헤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 겁니다. 설령 그릇된 해석이었다 해도 그게 맞았다고 박박 우기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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