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 부석사 | |
|---|---|
| 종파 | 화엄종→교종→선종→대한불교조계종 |
| 본존 | 아미타불 |
| 건립년대 |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2월[1] |
| 창건자 | 의상 |
| 문화재 | 무량수전,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
| 위치 | |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
| 좌표 | 북위 36° 59′ 56″ 동경 128° 41′ 15″ / 북위 36.9988527° 동경 128.6874968° |
| 영어명* | 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 |
|---|---|
| 등록 구분 | 문화유산 |
| 기준 | III |
| 지정번호 | 1562-2 |
| 지역** | 아시아·태평양 |
| 지정 역사 | |
| 2018년 (42차 정부간위원회) | |
| 웹사이트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홈페이지 |
| * 세계유산목록에 따른 정식명칭 ** 유네스코가 구분한 지역 | |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義相)이 봉황산 중턱에 세운 사찰이다. 행정구역상 주소지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이다.[2]
의상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전파하였으며, 절의 이름을 따서 의상을 부석존자(浮石尊者),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2]
고려 공민왕 21년(1372년)에 주지가 된 원응국사(圓應國師)에 의해 부석사 경내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다시 세워졌다.[2] 경내의 건축물 및 문화재 가운데 한국 국내에 소수 현존하는 고려 시대 건축물의 하나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유명하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연혁
[편집]부석사의 건립은 《삼국사기》에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676년) 봄 2월에 "고승(高僧) 의상이 왕의 명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의상은 용삭 원년(661년) 입당하여 이듬해부터 당의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문무왕 10년(670년) 귀국길에 올랐다. 부석사를 지은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문무왕 16년(676년)의 일이다.
무량수전 옆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절터의 공사를 방해하는 외도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다(후술). 부석사의 절 이름인 '부석'(浮石, 떠 있는 돌)이 이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건립 과정
[편집]부석사가 소재한 곳은 당시 신라 중앙과는 거리가 멀고 교통도 불편한 오지에 해당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화엄종이 설파하는 교리가 당시 기존의 불교와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으며, 부석사의 건립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봉지'(奉旨)[3] 혹은 '봉조지'(奉朝旨)[4]라 하여 어명으로 창건되었다는 언급에 대해서도 왕실과 밀접하였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전혜빈은 2025년에 《한국불교학》에 발표한 '문무왕대 의상(義湘, 625-702)의 활동과 부석사 창건의 의미'에서 부석사의 건립 과정을 당시 신라의 상황과 연관지어 해석하였다.
의상이 귀국한 것은 문무왕 10년(670년)의 일로, 당시 신라와 당은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 억눌려 있던 알력이 생겨나, 당은 신라의 백제 고토에 대한 경략 및 고구려 유민 수용을 문제삼아 신라의 사신 김흠순과 김양도를 억류하였고, 신라에 대한 군사적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당의 계획을 신라로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알리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 의상이었다. 한편으로 의상의 신라와의 밀착성 여부와 상관없이 의상 자신이 지엄 입적(668년) 이후 이미 귀국을 계획하고 있었다가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알리기 위해 귀국을 앞당겼을 뿐이라고 보는[5] 견해가 있는가 하면 당에서 (당 조정의 후원을 받고 있던) 법장과의 정통성 경쟁에서 밀려난 것이 귀국의 요인이 되었다는[6] 해석도 존재한다.[주 1]
의상에게 귀국하여 당의 계획을 알리는 역할을 부여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삼국유사》 안에서도 김인문[8] 또는 김흠순[9]이라고 하여 서로 다르다. 의상과 김인문은 똑같이 신라의 왕족이고 진골 귀족인데, 일단 그의 집안이 신라 왕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점에서 김인문과 의상 사이를 중개한 것이 김흠순 내지 김양도였을 것이고, 의상의 귀국을 최종적으로 인허(認許)한 인물이 김인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였다(전혜빈은 친당적인 인물인 김인문이 단순히 김흠순, 김양도 등의 계획을 허락하는 데에 그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상의 귀국은 의상의 호국적 면모 혹은 국가와의 밀착성으로 설명되고 있는데,[10][11] 전혜빈은 의상 자신으로써도 당에서의 교학적 한계와 더불어, 신라의 실질적 정치 권력자인 김흠순이나 김양도에 협력하여 신라의 왕자(이자 당의 숙위인) 김인문을 친견하고, 문무왕대 왕실에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왕실과 관계를 맺고 왕실의 주목과 후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계산한, 의상 자신이 신라에서 화엄을 전개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음을 인식한 점도 그의 귀국에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12] 물론 첨예하게 외교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의 군사적 기밀을 신라에 돌아가 알린다는 사실 자체가 의상으로써도 다시는 당으로 돌아갈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쓴 결정이었다는 점도 인정하고 있다.[13]
귀국 직후 의상은 관음신앙을 바탕으로 동해에 관음신앙을 바탕하는 낙산사(洛山寺)를 지어 자신의 불교적 위상을 드러냈고, 문무왕 14년(674년) 및 효소왕 즉위 원년(692년)에도 서라벌의 황복사에 머물렀으며[14] 왕경 혹은 그 인근을 지역에서 불교적 기반을 넓히고자 하였다.[15]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황복사에서 탑돌이(황복사탑은 692년에 지어졌다)를 하면서 신이함을 보인 뒤에 "세상 사람들이 보면 괴이하다고 할 것이니 세상에 가르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왕실과 밀접해 있던 밀교적 성향을 일부 수용하다가 방향을 선회한다는, 의상이 왕경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16]
나당전쟁이 한참 벌어지고 있던, 부석사가 창건되기 2년 전에 당에서는 문무왕에게 주었던 관작을 깎아 없애고 그가 신라왕임을 부정하였으며, 대신 수도에 머무르고 있던 왕자 김인문을 새로운 신라왕으로 임명하여 귀국시키고 그 길에 계림도대총관 유인궤가 이끄는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다.[17] 이에 문무왕은 이듬해 사죄사를 보내어 당에 사과 제스처를 비쳤고, 당은 문무왕에게 주었던 관작을 복구시키고 김인문도 돌아가게 하였다.[18] 문무왕과 김인문이 실제 정적으로써 대립하지만은 않았던[19] 것과 별개로 당이 김인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점을 문무왕이 단순히 넘겨버리기는 어려웠으며, 김인문이 귀국하지 못한 것은 이 점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주 2] 그리고 김인문과 마찬가지로 당에서 10년을 머무른 데다 김인문이 귀국을 허락한 인물로 김인문과의 교류가 부각되었던 의상 역시도 의심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던 상황에서[23] 의상은 왕경에서 이어오던 제자 양성과 전도 활동도 지속하기 어려워졌고, 태백산 일대로 옮겨가서[주 3] 화엄종을 전법할 도량으로써 부석사를 짓기에 이르렀다. 부석사를 짓는 과정에서 의상의 사찰 창건을 반대했다는 500여 명의 권종이부 집단은 단순한 기존 토착신앙 집단이나 재지 세력이면서 동시에 당에 우호적이거나 내지는 김인문 세력과 연관된 인물로 의심받았던 의상의 정치적 입장과도 무관하지 않다고[25] 할 수 있다.
부석사 창건 이후 의상은 지역 재지 세력을 교화하며 화엄 교학을 전개하였다. 창건 당시 권종이부의 반발과 부석신변 설화는 토착 세력과의 갈등과 긴장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그의 교화가 점차 수용되어 화엄 신앙이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부석사는 화엄 교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고, 의상의 명성은 지방을 넘어 중앙에까지 미쳤다. 이는 부석사가 단순한 사찰 창건을 넘어 왕권의 지방 통제와 불교 교학의 제도적 정착이 맞물린 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26]
의상의 창건 이후 이곳 부석사에서 수학하거나 가람에서 주지를 역임하면서 사찰의 입지를 공고히 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 785-861), 무염국사(無染國師, 800-888), 징효대사(澄曉大師, 826-895) 등이 알려져 있다.[27] 이후 부석사는 신라 말기 최치원이 《법장화상전》을 저술하던 무렵에는 남악(지리산)의 화엄사나 가야산의 해인사 등과 더불어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 꼽힐 만큼 화엄종 대찰(大刹)로 성장해 있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신라 말기 후고구려를 선포한 궁예가 부석사에 들렀던 적이 있으며, 마침 이곳에 봉안되어 있던 신라왕의 어진영을 보고 격노해 칼로 내리쳤고 그 칼자국이 《삼국사기》를 저술하던 당시까지도 벽에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 시대
[편집]고려 초기의 화엄종 승려로 정종~문종 연간에 왕사이자 국사였던 원융국사 결응(決凝, 964∼1053)은 부석사를 하산소로 삼아 정종 10년(1044년)부터 문종 7년(1053년)까지 주석하였다.[28] 문종 3년(1049년) 5월 과거에 급제한 이후 숙종 원년(1095) 참지정사(叅知政事)를 지낸 박인량(朴寅亮)이 부석사의 개창조인 의상을 기리는 해동화엄시조부석존자찬병서(海東華嚴始祖浮石尊者讚幷序)라는 글을 짓고,[29]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도 의상을 고평가하는 등[30] 11세기 중엽은 물론 11세기 후기까지 부석사는 고려 사회의 문인 지식인과 대덕고승으로부터도 불교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31]
부석사에는 지방에 파견되는 어사가 귀경할 때 숙박할 수 있는 객원이 마련되어 있었으며[32] 동시에 국왕 및 귀족 세력들과 연계된 사찰로써 무신집권기인 신종 6년(1203년)에는 부석사와 부인사 및 쌍암사의 승려들이 변란을 모의하였다는 이유로 병마사의 국문을 받아 그 승려들이 바닷섬으로 유배되기도 하였고[33] 신종 연간의 동경민란 때에는 국왕이 동경 지역의 봉기 진압과 지역 사회의 민심 안정을 기원하면서 부석사에 관료를 파견하여 부석사장륙상 앞에 의복을 봉헌하는 등[34]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엽까지 부석사는 국왕 및 관료들과 연계망을 확보하는 동시에 중앙과 지역 사회에서의 불교적 위상도 확보하고 있었고[35] 무신집권기에 타격을 입어 그 위상이 다소 위축된 시기도 있었으나, 고종 37년(1250년) 희종의 왕자인 충명국사(冲明國師) 각응(覺膺)이 승통(僧統)으로써 부석사 주지가 되는[36] 등 불교계와 함께 사회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다.[35]
원 간섭기에는 충선왕~충숙왕의 조정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언(代言) 등을 역임한 박효수(朴孝修)가 부석사를 방문하여 머무르기도 하였다.[37] 이를 통해 부석사가 14세기 초기까지 중앙관료와 연계망을 가지면서 상당한 역할과 위상을 지속적으로 확보[35]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공민왕 7년(1358년) 부석사는 왜구의 침략으로 무량수전을 비롯한 사찰이 불탔다. 이때 부석사가 입은 피해에 대해 1916년 와타나베 아키라(渡邊彰) 등이 무량수전을 해체 보수하면서 낸 보고서에 실린 조선 광해군 때의 묵서에 따르면[38] 무량수전의 본존불 얼굴과 머리 부분이 연기와 화염 중에 날아나가서 금당의 서쪽 모퉁이에 있는 문장석 위에 있게 되었으며 이를 우왕 2년(1376년)에 이르러 원응국사(진각국사 천희)가 본존불을 고쳐 만들고 금으로 다시 칠하였다고 적고 있다. 천희는 우왕 8년(1382년) 입적하였는데, 공민왕 21년(1367년)부터 부석사에서 주석하면서 전각들을 중수하였다.[39]
진각국사 천희의 부석사 중창은 부석사의 역사에 있어서 제2의 개산(開山)에 준하는 사건이었다. 우왕 3년(1377년) 5월 진각국사 천희의 주도로 건립된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의 건립 또는 중수불사에도 공양왕의 딸인 정신옹주(貞信翁主) 이씨(李氏)를 비롯하여 선사(禪師), 수좌(首座) 및 다양한 사원이 대시주로 참여하고 있는[40] 등 부석사는 당시 왕실과 함께 다양한 불교 종단 및 사원과의 연계망과 위상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41] 천희의 비문이 세워졌던 우왕 12년(1386년) 당시 천희의 문인이었던 충술(冲述)이 훗날 고려 왕실의 원찰인 개태사의 주지를 역임하였고[42] 우왕 9년(1383년) 건립된 여주신륵사대장각기비(驪州神勒寺大藏閣記碑)의 음기에 등장하는 부석사 승려 경남(敬南)은 훗날 태조(太祖) 2년(1393년) 태조 이성계가 주도한 해인사 대장경판 인출 불사에 참여하여 선교도총통 판승록사사 해인사 주지 국일도대사 등을 역임한다.
한편 부석사의 법맥에 대해서는 화엄종 가운데 의상―균여의 법계를 계승하는 핵심적 사원으로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대각국사 의천이 활동한 시기 그리고 현오국사(玄悟國師) 종린(宗璘) 및 충명국사 각응이 부석사에 주지를 지내던 시기에는 법맥의 계승과정에서 변동의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태이다.[43] 한편 13세기 중엽에 제작된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에 포함된 대방광불화엄경판과 불설아미타경판은 고종 37년(1250년) 7월에 충명국사 각응이 조성한 것으로, 화엄일승의 의상 법맥을 계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44] 아울러 대방광불화엄경판을 조성하였던 각수(刻手) 계원(戒元), 양수(良守), 인여(印如)는 고종 29년(1242년)부터 31년(1244년)까지 대장도감·분사도감에서 제작되어 이후 해인사 대장경판에 편입되는 《대방등대집경》 등의 다양한 개별 경판을 조성하였던 각수들의 인명, 법명과도 일치하는 것이다.[45]
조선 시대
[편집]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 경상우도감사 김성일이 올린 장계에는, 관동(關東) 지방에 있던 왜군이 7월 중에 영해(寧海)에 도착하였다가 도로 삼척(三陟)으로 돌아갔으며, 8월 중에 영월(寧越)로부터 영천의 부석사 등지로 넘어 들어왔다가 조선군에 쫓겨 도망치기도 하였다고 적고 있다.[46]
병자호란 당시의 척화신(斥和臣) 김상헌(金尙憲)이 요동에서 도망쳐 와서 부석사에서 머무르고 있던 승려 삼장(三藏)을 만나 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으며[47] 헌종(憲宗) 병신년(1836년) 이종재(李宗梓)가 자신의 조상인 고려 후기의 문인 이달충(1309?∼1385)의 시문집 《제정집》을 부석사에서 간행하기도 하였다.[48]

부석사는 숭유억불을 기조로 하였던 조선 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까지도 꾸준히 중수되고 재건되었다. 18세기까지 부석사에서 이루어졌던 잦은 중수 작업과 개금 불사 등에 동원된 인력이나 규모 면에서 이 시기 부석사는 사찰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지 않았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한편 고종 6넌(1869년) 문경의 대승사(大乘寺)와 목각 탱화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원래 부석사 무량수전에 있었으나 대승사에서 봉안하게 된 목각 탱화를 부석사측에서 여러 차례 부석사로 돌려 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대승사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최종적으로 고종 13년(1876년) 부석사 조사당 수리 비용을 대승사에서 지원하는 대신 목각 탱화는 그대로 대승사에 보관하여 두기로 결론이 났다.[49] 이때 부석사와 대승사 사이의 소송 관련 기록들이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관계문서라는 표제로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전해지고 있다.
근대 이후
[편집]1916년 무량수전과 조사당이 해체 수리되었다. 당시 응향각(凝香閣)의 수선 공사도 함께 진행되었다.
1919년에는 부석사의 부속 암자인 취현암(醉玄菴)의 이전 공사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건물 이전 과정에서 취현암에서 명 홍치(弘治) 6년(1493년) 및 만력(萬曆) 41년(1613년) 등의 몇몇 묵서 기록이 발견되었다.
해방 뒤인 1956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부석사를 방문하였을 때, 안양루(安養樓)의 편액을 직접 써주어 이곳에 걸리게 되었다.[50]
1971년에는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기와를 교체하였으며, 1984년에는 종각이 신축되었고, 이듬해(1985년)에 조사당 벽화의 보존처리공사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1996년 유물각을 개수하여 유물전시각으로 꾸며졌다. 2년 뒤 1998년에는 천왕문을 보수하였으며, 이듬해(1999)에는 요사채를 신축하고, 2000년 진입로를 보수하였다.
전설
[편집]선묘와 부석
[편집]《송고승전》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이 신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게 했고, 절터까지 따라와서 절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본래 이 절터에는 권종이부(權宗異部)라 표현되는 의상 집단과는 대척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의상이 이 곳에 절을 세우려고 하자 선묘가 무거운 바위를 사교의 무리들의 머리 위로 띄워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의 절 이름인 '부석'(浮石, 떠 있는 돌)이 이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무량수전 옆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 바위가 절터의 공사를 방해하는 외도들을 물리치기 위해 선묘가 띄워서 휘두른 바위라고 전하고 있다.
선비화
[편집]부석사 조사당 모퉁이에는 의상이 당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돌아왔던 지팡이가 뿌리를 내렸다는 골담초 나무가 전하고 있다. 현지에서는 '선비화'(禪扉花)라고도 불렸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순흥 지역의 읍지인 《재향지》에 따르면 의상이 절을 떠날 때 지팡이를 이곳에 꽂으며 "내가 떠나면 이 나무에 싹이 돋을 것이다. 이 나무의 영고(榮枯)를 보고 내 생사(生死)를 징험하라"고 하였고, 과연 그 말대로 싹이 돋고 뿌리를 내렸으며, 비를 맞지 앉고도 꽃과 잎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였다고 한다.[51]
《재향지》에는 숙종(肅宗) 경자년(1720년) 사이에 영천(榮川) 고을에 살던 집의(執義) 박홍준(朴弘儁)이 소년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하다가 선비화를 보고 중들이 헛소리를 한다며 "이제 내가 이 나무를 꺾어 버릴 터인데, 만일 네 말이 옳으면 내가 천금 같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네 말이 증명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의 미혹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라면서 장도를 꺼내 잘라 버렸는데, 박홍준은 아무 일이 없었고, 이후로 나무가 다시 싹이 나와 세 줄기로 되었다고 하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51] 그러나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박홍준의 일가 사람이었던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박홍준이 자신이 열하에 갔던 시점으로부터 수십년 쯤 전에 어떤 죄로 인해 곤장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다.[52] 또한 박지원은 박홍준 이전에 광해군(光海君) 때 경상감사(慶尙監司)를 지냈던 정조(鄭造)가 부석사에 왔다가 선비화를 보고 요망한 나무라 부르며, 승려들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선인(仙人)이 짚었던 지팡이를 나도 짚고 싶다"며 기어이 베어가지고 가 버렸고, 이후 인조반정(1623년) 때 죽임을 당하였다는[52][주 4]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박지원은 이를 기록하면서 "우연히 이에 기록하여 부박한 청년들에게 경계하기로 한다."는 코멘트를 남겼다.[52]
또한 전승에 따르면 의상은 이 지팡이를 비와 이슬에 맞지 않는 곳에 꽂으라는 말과 함께 "지팡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면 우리나라의 국운이 흥왕할 것이다"라고도 하였다고 하며, 문도들이 조사당 축대에 꽂았더니 과연 음력 4월 초파일께 버선 모양의 누런 장삼빛 꽃이 피었고, 국운이 흥하고 나라가 태평할 때는 늘 잎이 피고 꽃이 피었으며 구한말(舊韓末)에서 일제강점기 때는 잎은 피어도 꽃은 피지 않았던 것이 8.15 광복과 함께 30여년 만에 꽃이 피었다고 한다.[54]
선비화의 수령(樹齡)은 1300여 년이라 하나 높이는 불과 130센티미터 정도로 이 지방의 고로(古老)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장의 변화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54]
그런데 이 나무의 잎과 가지를 아이 못 낳은 여인이 따다 달여서 먹으면 임신할 수 있다고 해서 몰래 꺾어 가는 사람이 많아 나무가 자랄 여가가 없었다고도 한다. 일제 때에는 철책을 둘러 방지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피해를 면치 못했고 이후 처마까지 쇠그물로 둘러쳐서 철저히 보호하게 되었다고 한다.[54]
건축
[편집]《재향지》에는 부석사의 규모와 배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금당(金堂) 서쪽에 취원루(聚遠樓)가 있는데 돌계단을 깎아질러 높이가 10여 길이나 된다. 남쪽을 바라보면 온 산이 모두 눈앞에 펼쳐지는데, 시력이 좋으면 3백 리는 바라볼 수 있다. 취원루 북쪽에 장향대(藏香臺)가 있고, 금당 동쪽에 상승당(上僧堂)이 있고, 금당 뜰에 광명대(光明臺)가 있고, 그 앞에 안양문(安養門)이 있다. 문 앞에 법당(法堂)이 있는데, 법당의 왼쪽은 선당(禪堂)이고 오른쪽은 승당(僧堂)이다. 그 앞에 종각(鍾閣)이 있으며 역시 널찍하고 시원하다. 종각 아래에 또 대여섯 곳의 당실(堂室)이 있는데, 회전문(廻轉門)ㆍ조계문(曹溪門)이 있다. 그 앞에 큰 계단이 있다. 높이가 4~5길은 되고 길이가 1백여 보는 된다. 큼직한 돌을 층층이 쌓아 깎아지른 듯하고 옆으로 이어져 대(臺)를 이루어 온 절간이 그 위에 실려 있다. 귀신이 이룬 듯한 것으로 역시 장관이다. 또 그 아래 수십 보쯤에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그 아래 1리쯤에 영지(影池)가 있다. 절의 누각이 모두 이 연못 속에 비친다. 조전(祖殿) 서쪽에 영산전(靈山殿)이 있고, 또 그 서쪽에 은신암(隱神菴)이 있다. 은신암 동쪽에 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몇 길 되고 위에는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은신암 동서에 대(臺)가 있는데, 안계가 탁 트인 것이 이 산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다. 그 아래 골짜기에 극락암(極樂菴)이 있다. 조전 동쪽 골짜기에 동전(東殿)이 있고, 동전 뒤에 국사비(國師碑)가 있다.
부석사의 문루인 취원루는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이름이 보이는데[55] 《재향지》가 지어졌던 1899년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존하는 부석사 경내의 전각들 가운데 취원루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무량수전
[편집]부석사의 중심 건물로써 금당이자 대웅전 역할을 하고 있는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된 목조 건축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18호이다. 한국에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고려 시대의 건축 법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안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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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루(安養樓)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위치한 누각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위쪽, 아래쪽 편액이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의 편액은 "안양문", 위층 마당 쪽은 "안양루"라고 씌여 있다. 문과 누각의 2가지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극락이란 뜻을 가진 '안양'의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고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경치를 시문으로 남겼고, 누각 내부에 시문 현판이 담겨있다.[56]
2층 공포와 공포 사이로, 여러 개의 금색불상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안양루(安養樓)라고 씌여진 현판
-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좌측이 안양루, 우측이 무량수전)
선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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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각(善妙閣)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고, 의상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선묘라는 인물을 모신 건물이다.
조사당(祖師堂)'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위치한다. 의상과 역대 조사를 기리는 곳이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9호다.
취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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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현암(醉玄庵)은 조사당 동쪽 바로 옆에 있다. 1997년도에 복원되어 2002년까지 선원으로 활용되다 현재 부석사 산내암자로서 쓰이고 있다.[56]
응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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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진전(應眞殿) 무량수전 영역의 북편 위쪽에 떨어져 위치해 있다. 자인당과 함께 거의 일렬로 남향하여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1976년에 번와 보수하였다. 이 건물의 공포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장식적인 익공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는 내부에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과 고졸한 십육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56]
자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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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당(慈忍堂)은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로,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이안했다 자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공포가 건물 규모에 비하여 너무 크고 측벽에 여러 가지 형태의 옛 부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경에 해체 부재를 재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실내에는 석조 삼존여래 좌상(보물 제220호)을 모셨는데 가운데는 석가여래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이다.[56]
단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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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하각(丹霞閣)은 최근세 지어진 것으로, 응진전 뒤쪽에 위치한다. 단하각(丹霞閣)의 "단하"(丹霞)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사리를 얻기 위하여 목불(木佛)을 쪼개 땠다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丹霞天然) 선사를 모신 것이라면, 선종과 연관이 있는 전각이다. 그러기에 도량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선방 근처에 지었는지도 모른다.[57]
범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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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梵鐘樓)는 구조는 누각식 문으로, 2층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이루어졌다. 위에는 현재 종이 없고, 북과 목어가 걸려있다. 지붕은 정면 부분이 팔작지붕의 측면인 합각, 뒷부분이 맞배지붕이 측면인 박공 부분이다. 2층 뒤쪽 가운데 한 칸을 뚫어 밑에 계단을 세워 안양문이랑 향하게 하였다.[58]
1957년 범종각을 수리할 때 마포에 쓰인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며, 상량문에는 '도광 23년 계묘 4월 초엿새'라는 날짜가 적혀 있어 헌종 9년(1843년) 범종각이 중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59]
- 범종루에서 좌측에 보이는게 삼층석탑이다.
- 뒤쪽에서 본 범종루
- 범종루의 북과 목어
선열당
[편집]선열당(禪悅堂)은 범종각과 안양루 사이에 위치하며,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이용되고 있다.[56]
응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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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향각(凝香閣)은 취현암 앞에 위치하며 원래는 강원 건물이었다.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에 위치했었는데, 통로와 너무 인접하여 1980년 철거하고 뒤로 물려서 신축하였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최근 전면에 마루를 달았다.[56]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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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각(三聖閣)은 칠성, 독성, 산신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해 있다. 원래는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1979년의 부수때까지는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였고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셨었다.[56]
종각
[편집]종각(鐘閣)은 범종을 보관하는 건물로, 1980년의 보수공사 이후 신축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기둥만 새우고,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다.[56]
문화재
[편집]- 국보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제17호)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제18호)
- 영주 부석사 조사당 (제19호)
-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제45호)
-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 (제46호)
- 보물
-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제220호)
-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제249호)
-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제255호)
-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제735호)
-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진본 (제735-1호)
-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주본 (제735-2호)
-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 (제735-3호)
-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 (제1562호)
-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제1636호)
- 영주 부석사 안양루
- 영주 부석사 범종각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제127호)
-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제130호)
사진
[편집]- 일주문 앞쪽 현판
- 일주문 뒷쪽 현판
- 일주문 뒷쪽 현판
- 전 대통령 이승만이 쓴 부석사 현판. 부석사 안양루에 걸려 있다.
- 안양루
- 조사당
- 무량수전
- 무량수전과 무량수전 앞 석등
- 보물 제220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 삼층석탑
-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영산회상도
- 장경각(藏經閣)
각주
[편집]내용주
[편집]- ↑ 한편 《송고승전》에는 문무왕이 의상을 크게 공경하여 전장과 노복을 의상에게 하사하였으나 의상이 《열반경》의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을 들며 사양하였다는 일화가 있는데(《송고승전》권4, 의상전), 전혜빈은 문무왕이 사찰에 대한 개인적인 희사를 금하기도 한 적이 있는 만큼 의상이 귀국하여 당의 침공 계획을 알린 공에 대한 포상 차원에서 이루어진 하사가 아니었을까 해석하고 있다[7].
- ↑ 신라 국내에서도 문무왕 13년(673년)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 적발되기도 하고[20] 15년(675년)에는 김진주의 아들인 풍훈이 아버지의 죽음을 핑계로 당의 길잡이가 되어 당의 신라 침략에 적극 협조하기도 하였다.[21] 또한 김흠순 또한 그의 형으로 신라 정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김유신이 문무왕 13년(673년)에 사망하는 등 달리 의상을 지지해 줄 만한 여력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22]
- ↑ 부석사가 세워지게 되는 태백산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송고승전》에 문무왕이 의상에게 주었다는 전장이 바로 부석사가 소재한 영주 인근 지역에 소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있다.[24]
- ↑ 실제로 정조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인 인조 1년(1623년) 이이첨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53]
출처주
[편집]- ↑ 《삼국사기》권7, 신라본기7, 문무왕 하
- 1 2 3 사회 I·문화재 > 문 화 재 > 중요 문화재 > 경상북도 > 부석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삼국사기》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6년(676년)
- ↑ 《삼국유사》권4, 의해제5, 의상전교
- ↑ 김상현(1984), '신라 중대 전제왕권과 화엄종' 《동방학지》4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73쪽:정석기(1988), '신라시대 부석사의 사회·종교적 기능'《창람사학》2, 청람사학회, 67쪽
- ↑ 김지견(2002),《화엄사상과 선》 서울:민족사, 91쪽
- ↑ 전혜빈(2025), '문무왕대 의상(義湘, 625-702)의 활동과 부석사 창건의 의미' 《한국불교학》제116집, 한국불교학회, 98쪽
- ↑ 《삼국유사》권2 기이제2, 문호왕 법민
- ↑ 《삼국유사》권4, 의해제5, 의상전교
- ↑ 김재경(1992), '신라중대 화엄신앙의 사회적 역할' 《진단학보》73, 진단학회, 6쪽
- ↑ 윤범모(1976), '부석사의 창건과 가람배치' 《동국사상》9,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117쪽
- ↑ 전혜빈(2025), 앞의 논문, 《한국불교학》제116집, 한국불교학회, 84쪽
- ↑ 전혜빈(2025년), 앞의 논문, 《한국불교학》제116집, 한국불교학회, 84~85쪽
- ↑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상1 및 《삼국유사》 권제4, 의해제5, 의상전교
- ↑ 전혜빈(2025년), 앞의 논문, 《한국불교학》제116집, 한국불교학회, 91쪽
- ↑ 전혜빈(2025), 앞의 논문, 《한국불교학》제116집, 한국불교학회, 95쪽
- ↑ 《삼국사기》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4년(674년)
- ↑ 《삼국사기》권제7,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675년)
- ↑ 김수태(1999), '나당관계의 변화와 김인문' 《백산학보》52, 백산학회, 669쪽
- ↑ 《삼국사기》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3년(673)
- ↑ 《삼국사기》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675년) 가을 7월
- ↑ 전혜빈(2025년), 앞의 논문, 《한국불교학》제116집, 한국불교학회, 102쪽
- ↑ 전혜빈(2025), 앞의 논문, 《한국불교학》제116집, 한국불교학회, 102쪽
- ↑ 김윤곤(1991), '나대의 사원장사:부석사를 중심으로' 《고고역사학지》7, 동아대학교 박물관, 276쪽
- ↑ 전혜빈(2025년), 앞의 논문, 《한국불교학》제116집, 한국불교학회, 104쪽
- ↑ 전혜빈(2025년), 앞의 논문, 《한국불교학》제116집, 한국불교학회, 106쪽
- ↑ 임기영(2014) '부석사 간행의 판본 연구' 《서지학연구》제59집(2014.9) 309쪽
- ↑ '順興 浮石寺 圓融國師碑文', 《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고려편2, 伽山文庫, 1995, 269·290쪽
- ↑ 《圓宗文類》권22, 讚頌雜文類.
- ↑ '신집원종문류서'《대각국사문집》권1
- ↑ 최영호 (2019년) '고려 시대 부석사의 역사·문화적 성격'《석당논총》73집, 8·9쪽
- ↑ 《보한집》권하
- ↑ 《고려사절요》권14, 신종 6년 9월
- ↑ 이규보 '부석사장륙전원문' 《동국이상국집》권38, 도량재 초·소제문
- 1 2 3 최영호 (2019년) 앞의 논문, 《석당논총》73집, 10쪽
- ↑ 《고려사》권4 종실 희종왕자 충명국사 각응전
- ↑ 《신증동국여지승람》권25, 경상도 영천군 불우
- ↑ 《봉암산부석사중수기》(鳳凰山浮石寺改椽記);渡邊彰, '鳳凰山浮石寺保存工事執行의際에現한古記錄의歷史的價値', 《朝鮮佛敎叢報》제5호, 三十本山聯合事務所, 1917, 27~29쪽
- ↑ (《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 수원박물관 소장
- ↑ 이기백 편, 浮石寺 祖師堂 棟樑記 《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 일지사, 1987, 235~236쪽 ; 渡邊彰, 鳳凰山浮石寺保存工事執行의際에現古記錄의歷史的價値 , 《朝鮮佛敎叢報》제6호, 삼십본산연합사무소, 1917, 44~46쪽 ; 申榮勳, 《韓國古建築上樑記文集》, 考古美術同人會, 1964 ; 熊谷宣夫, 朝鮮佛畵徵 , 《朝鮮學報》44, 天理大學 朝鮮學會, 1967
- ↑ 최영호 (2019년) 앞의 논문, 《석당논총》73집, 10쪽
- ↑ 洪武十九年丙寅正月 日 門人開泰寺住持妙智無碍通照大師 冲述 立石 比丘恵岑 刻(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 , 수원박물관 소장)
- ↑ 최영호 (2019년) 앞의 논문, 《석당논총》73집, 13쪽
- ↑ 최영호 (2019년) 앞의 논문, 《석당논총》73집, 21~22쪽
- ↑ 최영호 (2019년) 앞의 논문, 《석당논총》73집, 20~21쪽
- ↑ '경상우도 감사(慶尙右道監司)로 있을 적에 올린 장계' 《학봉속집》 제3권 장(狀)
- ↑ '부석사(浮石寺)에서 요동(遼東)의 승(僧) 삼장(三藏)에게 주다'(절은 영천(榮川)에 있으며, 삼장은 오랑캐들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으로 왔다.)《청음집》권2 칠언절구
- ↑ 《제정집》 발문
- ↑ 《대승사목각정문서》(大乘寺木刻幀文書)
- ↑ 문화재청, 《부석사 무량수전 실측조사보고서(本文)》 (대전: 문화재청, 2002), 70.
- 1 2 《재향지》 사찰
- 1 2 3 《열하일기》피서록보
- ↑ 《인조실록》 인조 1년 계해(1623, 천계) 3월 19일(기유)
- 1 2 3 부석사 조사당의 선비화 - 영주문화원
- ↑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부(附) 순흥도호부
- 1 2 3 4 5 6 7 8 9 “부석사 - 성보문화재”. 2017년 11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11월 15일에 확인함.
- ↑ 김보현, 배병선, 박도화 외 (1995). 《부석사》. 대원사. ISBN 9788936901714.
-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범종루
- ↑ '단상단하' 《동아일보》1957년 8월 27일자 1면
- ↑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고대문화의 융성 > 부석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